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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 2020

1812년 미국과 영국과의 전쟁

1812년 미국과 영국과의 전쟁

1812년 미국과 영국과의 전쟁 - 뉴올리언즈 전투

1812년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을 치루면서 많은 희생을 치루었고, 영국은 1814년 8월 수도 워싱턴 D.C.를 점령하고 불태우는 등 미국에 많은 손실을 안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뉴욕, 볼티모어, 뉴올리언스에서 영국의 침략을 격퇴함으로 인해, 국가적인 자신감을 높이고 새로운 애국정신을 배양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815년 2월 17일 겐트 조약(Treaty of Ghent)은 전쟁을 종식시켰지만, 여러가지 논쟁이 될 수 있는 사항들을 뒤로하고, 여전히 많은 문제점들을 풀지 못한채 전쟁을 끝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많은 사람들은 1812년 영국과의 그 전쟁을 “제2의 독립 전쟁”으로 기념하며, 당파를 초월한 국가적 자부심을 갖는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영국의 미국에 대한 횡포

19세기 초, 영국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의 프랑스와 길고 기나긴 갈등 속에 갇혀 있었다. 물자를 적에게 보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시도로, 프랑스와 영국은 미국이 다른 국가들과 무역 거래 하는것을 막으려고 했다. 1807년 영국은 중립국들이 프랑스나 프랑스 식민지와 거래하기 전에 영국으로부터 허가 받을것을 요구하는 칙령을 통과시켰다. 거기에다가 영국 해군은 미국 상선의 선원들을 강제로 영국군에 복무하도록 강요 함으로써 미국을 격분시켰다.

미국의 비교류적 조치(Non-Intercourse Act)

1809년 미국 의회는 무역을 제한함으로써,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미국인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 토마스 제퍼슨의 금수조치(Embargo Act)를 폐지했다.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비교류적 조치(Non-Intercourse Act)는 영국과 프랑스와의 무역을 금지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것 또한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중 어느 한 국가가 미국에 대한 무역 제한을 철회할 경우, 미국 의회는 그 반대 국가에게 비교류적 조치를 가할 것이라는 내용의 1810년 5월 법안을 발효하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의 전쟁 조짐

그러자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미국과의 무역제한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후, 미국의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대통령은 그해 11월 영국과의 모든 무역을 봉쇄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헨리 클레이(Henry Clay)와 존 칼훈(John C. Calhoun)이 이끄는 새로운 의원들이 그 해에 선출되었다. 그 의원 그룹 세력들은 영국의 해양권 침탈에 대한 분노와 미국의 서부지역 확장에 대한 영국인들의 미국 원주민들 선동과, 그 원주민들로 하여금 미국에게 적대감을 갖게끔 한다는 것등을 근거로 전쟁을 말하기 시작했다.

티페가노 전투 승리와 미국 원주민의 불안

1811년 가을, 인디애나 주의 주지사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은 티페카노(Tippecanoe) 전투에서 미군들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투에서 미국의 승리는 북서부 지역의 많은 어메리칸 원주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그들의 땅에서 미국인들로부터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영국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전쟁에 대한 미국내의 의견 분열

한편 1811년 후반에 이르러 의회의 이른바 ‘전쟁매파(War Hawks)’들이 당시 대통령 이었던 매디슨에게 점점 더 많은 압력을 가하고 있었고, 1812년 6월 18일 메디슨 대통령은 결국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서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의회는 결국 영국과의 전쟁에 찬성했지만, 상하원 모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이 심하게 갈렸다.

대부분의 서쪽지역과 남부쪽 의원들은 전쟁을 지지했지만, 연방주의자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영국과의 무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전쟁을 옹호하는 의원 그룹들의 확장주의적 견지를 합리화 하기 위해 해양권이라는 구실을 같다 붙히면서 전쟁을 서슴치 않는다고 말하면서 전쟁 옹호론자들을 비난했다.

미국의 캐나다 공격

영국을 공격하기전 미군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캐나다를 먼저 공격했다. 당시 미국 관리들은 미국 군대가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집중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한 채, 무조건 침공하면 성공한다는 지나친 낙관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캐나다를 침공한 미국 군대는 지금 캐나다의 온타리오(Ontario) 주에서 영국의 군인이자 행정가인 아이작 브록(Isaac Brock) 경에의해 잘 훈련된 수비대와 맞딱뜨렸다.

미국의 패배와 디트로이트 함락

1812년 8월 16일, 아이작 브록이 이끄는 영국군과 어메리칸 원주민의 추장인 테쿰세(Tecumseh)가 이끄는 군대는 미시간 주지사인 윌리엄 헐(William Hull)이 이끄는 미국 군대를 캐나다 국경을 넘어 맹렬히 추격하면서 아무런 사격이나 싸움도 하지 않고, 그냥 겁만 준채로 디트로이트를 함락 시키면서, 미국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겼다.

디트로이트의 재 탈환

1813년 9월 올리버 해저드 페리(Oliver Hazard Perry) 장군(Commodore)이 이리 호수(Lake Erie) 전투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면서, 서부지역의 미국은 상황이 좀 풀리는 듯 보였다. 그 후, 인대애나 주지사인 해리슨은 템즈(Thames) 전투에서 미국 원주민 추장인 테쿰세를 전사시키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디트로이트를 재탈환하게 되었다.

영국군에게 함락된 후, 불에 탄 워싱턴 D.C.

한편, 미 해군은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영국의 왕실 해군(Royal Navy)을 상대로 몇 번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814년 4월 영국은 나폴레옹 군대를 패배 시키면서 북아메리카에서의 전쟁에 모든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병력이 미국에 도착하자 영국군은 체사피크 만(Chesapeake Bay)을 급습하며, 미국 수도인 워싱턴으로 진입하여 1814년 8월 24일, 워싱턴 D.C.를 점령하고 의사당과 백악관 등 정부 건물을 불태워 버렸다.

미국의 승리

1814년 9월 11일, 뉴욕 챔플레인(Champlain) 호수에서 벌어진 플랫츠버그 전투(Battle of Plattsburgh)에서 미 해군은 영국 함대를 무참히 격파했다. 그리고 1814년 9월 13일 볼티모어의 포트 맥헨리(Baltimore’s Fort McHenry) 요새는 영국 해군의 25시간의 폭격을 견뎌냈다. 다음 날 아침, 이 요새에 주둔해 있던 미군들은 거대한 미국 국기를 게양했는데, 이 광경은 훗날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가 음악에 맞춰 시를 쓰도록 영감을 주었고, “성조기(Star-Spangled Banner)”로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군은 이후 체서피크 만(Chesapeake Bay)을 떠나 뉴올리언스에서의 전투를 위해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1814년 겐트 조약과 뉴올리안즈 전투

그 무렵 지금의 벨기에인 겐트(Ghent)에서는 미국과 영국간의 평화회담이 이미 시작되었고, 영국은 볼티모어에 대한 공격 실패 후 휴전을 위해 움직였다. 이어진 협상에서 영국은 캐나다 국경을 그대로 떠나고, 북서부에 미국의 원주민 도시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다. 1814년 12월 24일, 위원들은 다음 2월에 비준될 겐트 조약(Treaty of Ghent)에 서명했다.

1815년 1월 8일, 평화가 타결된 사실을 모른 채, 영국군은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큰 공격을 가했고, 당시로 보면 미래의 대통령이 될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패배를 당했다. 1812년 영국과의 전쟁은 앤드류 잭슨, 제이콥 브라운, 윈필드 스콧을 포함한 새로운 세대의 위대한 미국 장군들을 배출했고, 잭슨,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윌리엄 헨리 해리슨 등 걸출한 인물들이 대통령직에 오르도록 도왔다.

1812년 전쟁이 끼친 영향

비록 1812년 전쟁은 미국과 영국에겐 비교적 사소한 분쟁일 수 있었지만, 캐나다인들과 미국 원주민들에게는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다는 큰 상실감을 안겨다 주었다. 그리고, 겐트 조약은 수십 년간 지속된 미국 정부내의 당파적인 내분을 종식시키고, 서로 화합하고 단합하는 시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이 전쟁은 결국 미국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은 또한 전쟁을 반대했던 연방주의자들에 대한 종말을 가져왔고, 독립전쟁(Revolutionary War) 부터 시작된 영국혐오주의(Anglophobia)의 전통을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전쟁으로 인해 국가적 자신감을 높이고, 19세기의 형성될 미국의 팽창주의의 성장 정신을 장려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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