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L.A. 폭동과 코리아 타운

1992년 L.A. 폭동과 코리아 타운

March 18, 2019 역사 (History) 0

1992년 로스 앤젤레스 폭동은 로스 앤젤레스 도시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코리아 타운 청소년 커뮤니티 센터 (Koreatown Youth and Community Center, KYCC)와 코리아 타운 이주 노동자 연합 (Koreatown Immigrant Workers Alliance, KIWA)과 같은 비영리 단체의 중요성이 부각 되었다. 이 단체들은 낮은 사회적 지위와 언어 장벽 때문에 정부기관 으로부터 거의 지원받지 못한 한인 소상공인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배상책임에 대한 금전적 혜택을 받을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폭동 사태가 발생했을 당시 흑인과 한인들은 인종 차별에 시달리고 있었다. 흑인지역에서 장사를 하던 이전 백인들이 그 지역을 떠날때 한국 교민들은 그들로 부터 사업장들을 인수했었고, 한국 교민들은 그들이 인수한 지역인 흑인 지역 에서 대부분 장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 폭동의 발단은 백인 경찰들이 흑인인 로드니 킹 (Rodney King)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폭행한것에서 시작 되었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은 흑인들이 한인 교포들이 몰려있는 상점들을 약탈하는 과정을 보도 하면서 한인들과 흑인들의 갈등으로 진위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한 주간의 폭동으로 L.A. 의 많은 부분이 파괴 되었고, 폭동으로 인한 피해액은 약 5천만 달러로 집계 되었으며, 그 중 절반은 한국인 소유의 사업체 였다. 폭동으로 인한 피해도 피해이지만 경찰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소수민족으로서의 차별은 교민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교민들의 일부는 백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한인들이 희생 되었다는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인중 일부는 백인중심의 사회에서 소수민족이 살아남는 방법은 소수민족끼리 뭉쳐 정치적 힘을 키우는것이라고 강조 했다.

그리하여 1992 년의 이 폭동은 한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정치적 행동주의의 물결을 촉발 시켰지만, 그 행동에 대한 지침은 한인 사회에서 두 개의 의견으로 나누어 지게 되었다.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진영과 보수의 가치를 중시하는 진영으로 의견들을 달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인종적 억압과 그 피해에 맞서 싸우기 위해 로스 앤젤레스에 있는 다른 소수민족과 연합 하려 했다. 보수파는 법과 질서를 강조하고 공화당의 경제 및 사회 정책 방향을 대체로 선호하자는 주의 였다. 보수파는 또한 한국인과 다른 소수 민족, 특히 흑인과 히스패닉계와의 정치적 차이점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인 공동체내의 이러한 분열된 의견에도 불구하고, 1992년의 폭동은 또한 교섭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인종간의 연대를 꾀하려는 많은 노력이 시도 되었다. 1992년 코리아 타운 평화 집회는 세대 및 인종 간의 연대를 표방하면서 3만 명이 넘는 참석자들이 참여하는 시위로 기록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폭동을 직접 경험하고 약탈 당했던 한인 소상공인들은 아직도 그들이 당시에 경찰이나 정부로부터 보호받지 못 했다는 사실로 인해 큰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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